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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믿음 바른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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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25, 2022 가끔 길을 잃을 때
    선천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육체적(?)이라 해야 할지 제 개인적으로 병의 일환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지만, 한 가지 고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방향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저는 본능적으로 제가 보는 앞쪽을 무조건 북쪽으로 생각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더라도 지도 혹은 오늘날과 같이 네이게이션이 없으면 길을 찾는데 매우 어려움을 느낍니다. 여기 뉴저지로 온지도 벌써 8개월이 거진 다 지나고 있습니다. 8개월 정도면 어느 정도 동서남북이 분간이 될 만도 한데, 여전히 아침경건회를 위해 이른 새벽, 차를 몰고 나올 때마다, 혹은 Lakeland쪽으로 내려갈 때는 무의식적으로 북쪽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생각해 봐도 어떻게 20대 젊은 시절을 직업군인으로 살았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때 가장 어려웠던 과목이 있었습니다. 당연 ‘독도법’(지도와 나침을 이용하여 목표지점을 찾아가는 교육)이었습니다. 독도법 수업을 받는 내내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업의 마지막 과정인 지도와 나침반을 가지고 2인 1조가 되어서 동료와 함께 6시간 내로 걸어서 목표지점에 도착해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예행연습을 하는 시간 내내 한 번도 길을 잃어버리거나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한 적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방향감각이 덜 발달되어 있는 대신 지형지물 분석력이 남들보다 조금 나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실패하지 않았다기보다 사실은 독도법이라는 수업을 받으며 ‘나침반’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나침반의 특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이 나침반은 저와 비슷한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놈은 무조건 어디에 가져다 놔도 북쪽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저와 나침반은 공통적으로 북쪽을 바라보고 생각하는데, 정작 저는 길을 잃는 경우가 있지만, 나침반은 언제나 정확한 북쪽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제가 보고 있는 앞쪽이 마치, 누가 뭐라 그래도, 북쪽인 것 같아도 어김없이 방향지시계를 쳐다보면 북쪽이 아닐 때가 많음을 봅니다.   그럴 때마다 한 번씩 기억을 상기해 봅니다. 내 생각과 내 마음이 꼭 바른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정북을 늘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과연 내 삶의 정북을 가리키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말입니다. 혹여 여러분 가운데서도 지금 길을 잃어버리시거나 어느 쪽이 북쪽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우리 인생의 나침반인 ‘성경’을 펼쳐보시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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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18, 2022 예수의 부활, 역사적 사실인가?
    2017년 개봉된 기독교 영화가 있습니다. ‘예수는 역사다’ 라는 영화입니다. 2006년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가 나오고 난 뒤 거진 10여년이 지난 뒤 나오게 된 기독교 영화입니다. 2006년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가 상영될 당시 미국과 한국을 비롯해서 상연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 등, 기독교내에 적잖은 파장과 반발이 있었습니다. 거진 2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기독교 내에 절대적인 가치와 중심내용으로 존재해 오던 것들이 2000년대를 들어서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빈치 코드’를 시작으로 ‘유다복음’ 등등, 한 번도 일반사회로부터 기독교 교리와 사상이 도전받아보지 않았던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 기독교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과 특히 그의 부활의 역사를 증명하는 기독서적들이 많이 출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기가 늦었음을 직감해야 했습니다. 2000년 초반만 하더라고 ‘긍정의 힘’과 ‘신비주의’, ‘은사주의’와 같은 기복주의적 번영신학에 빠져 더 이상 기독교가 기독교가 아닌, 이상한 변종 기독교가 되어 세상을 향해 냉철한 이성과 지성, 그리고 탁월한 영성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과 그 부활의 사실을 말하기에는 세상이 이미 관심을 잊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0여년이 흐른 2017년 ‘예수는 역사다’라는 영화가 조금씩 우리가 잊고 있던 기독교의 참된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한 관심을 신자들로 하여금 다시 갖게 하였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2002년 ‘예수 사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출간된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리 스트로벨 목사(시카고 트리뷴지의 법률 당당 기자였음)는 자신이 기사생활을 하던 시절 예수의 부활의 허구를 증명하고자 시작했던 그의 여정이 결국 예수가 역사적 사실이며, 그의 부활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들이 넘쳐남을 깨달아 알게 된 뒤, 결국 무신론자였던 자신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무릎 꿇고 유신론자가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한물간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으로 인해 변질되어 이상한 변종 종교로 전락시켜 버렸으며 근본없는 복음주의 영향으로 동양철학과 명상을 혼합한 인문학적 큐티운동으로 성경을 심각하게 왜곡함으로 교인들의 신앙을 철저한 교리와 신학에 근간하여 바른 믿음으로 양육한 것이 아니라, 이방 종교와 다를 바 없는 변종 기독교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지켜온 삼위일체 교리, 성육신 교리(그리스도론)은 물론, 종교개혁으로 인해 우리 구원의 확실성을 증거했던 ‘이신칭의’ 교리까지 말살시켜 버렸습니다. 부활주일을 맞이하며 다시 우리는 종교개혁가들의 주창했던 참된 개혁주의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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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11, 2022 종료주일인가, 종려주일인가
    일반적으로 오늘을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로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의와 아름다움, 승리 등을 상징입니다. 어렸을 때 종려주일을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 한참을 ‘종료주일’로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지상에서 자신의 구원의 사역을 마감하신 마지막 주일이라 그 일을 ‘종료하신 날’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참 어의가 없는 생각이었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하튼 예수님께서는 종려주일인 이날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Palm Tree)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종려주일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385년경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에 나오는데, 당시 동로마 교회에 속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축하의 의미로 종려 행렬이 나섰다고 합니다. 반면 서로마 교회들은 축하 분위기 대신 애도의 성격을 띠었다고 합니다. 6세기경 스페인 의식서를 보면, 5세기경 동로마 교회의 종려주일 풍습이 전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종려주일에 대한 이해를 두고서도 초기 기독교는 서로 다른 성격의 해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그 다음 날부터 한 주간을 ‘수난주간(受難週間)’ 혹은 고난주간이라고 불리는 부르며 초기 기독교회와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절기로, 부활주일 직전까지의 한 주간을 지킵니다. 예로부터 교인들은 고난주간이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냈습니다. 특히 최후의 만찬과 세족식을 기념하는 목요일, ‘세족목요일(洗足木曜日)’과 주님이 십자가 달려 돌아가신 금요일, ‘성금요일(聖金曜日, Good Friday)’은 더욱 경건하게 보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난 주간이 되면 가급적 오락을 금하고 금식을 많이 장려하기도 합니다.   또는 우리교회와 같이 사순절을 따로 기념하지 않는 일부 교단들도 고난주간에만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묵상하기도 합니다. 마르틴 루터(Luther)는 종교개혁을 통해 고난주간에 행해지던 로마 가톨릭 의식들을 대부분 폐지했으나, 츠빙글리(U. Zwingli)의 영향 아래 부분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지난 주 목회칼럼을 통해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 기독교의 사순절과 고난주간 지킴은 그리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널리 장려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나 오늘날 같이 바쁜 시대를 사는 우리가 잠시 잠깐 가던 길을 멈추고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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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04, 2022 히브리 정경에서의 룻기의 위치
    현재 개신교 성경인 구약성경에서 룻기의 위치는 구약 창세기로부터 8번째 위치한 책이다. 사사기 다음에 위치한다. 아마도 성경을 배열할 때 룻기의 이야기가 사사 시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면 히브리정경에서는 룻기의 위치는 우리와는 다른 위치에 배열되어 있다. 일명 성문서라고 하는 부분에 배치가 되어 있는데, 히브리정경에서는 잠언 뒤에 위치한다. 그 이유는 잠언 31장의 내용이 ‘현숙한 여인’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그 현숙한 여인의 대표격으로 룻을 나타내고자 히브리인들은 룻기를 잠언 뒤에 배치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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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04, 2022 고난주간 시편 통독을 하고자 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현재 우리 개신교 내에 지켜지고 있는 기독교 절기를 다시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초대교회에서부터였는지는 모르나 고대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점으로 해서 유대교의 절기를 따라 기독교의 절기를 만들었기에 그 타당성의 여부를 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는 절기 개념이 전무하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절기는 2세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공교회의 몇 모임에서도 기독교의 절기가 성경적이지 않음을 들어 완전 폐기되어야 함을 적잖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진정한 개혁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라면 현재 기독교가 가진 교회력이 과연 성경적인 것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순절과 고난주간 같은 것을 굳이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해서 신자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부활절을 일년에 한 번 특별히 지킨다는 것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매우 축소시키는 변질을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이 담긴 사도행전이나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면 오늘날 개혁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주일로 지키게 된 것도 안식 후 첫날인 주일, 주님께서 부활하심을 기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주일을 개혁교회가 예배하는 날로 지키는 것 자체가 바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며 그 예배에 성찬을 가짐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함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매 번 이루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개혁교회는 주님의 부활의 의미도, 성찬의 의미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그렇다보니 주 예수의 부활과 주님과 연합됨을 이루는 성찬을 잃지 않고자 특별한 날을 지정해서라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인 것 같습니다. 이런 교회의 생각과 노력은 결코 성경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빈도 주일을 제외한 다른 날을 기념하여 예배하거나 절기로 지키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특별한 것들을 의식적으로 만들어 특별한 기념을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자칫 우리의 신앙을 미신(迷信)화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독교회가 고난주간을 정하고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자고 하기에 그걸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알고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고난주간을 지키는 것 자체는 그리 의미가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늘 주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이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이제 다음 주면 고난주간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에는 뭐 특별한 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전교인들이 함께 나와 시편을 통독해 보고자 합니다. 고난주간이라는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여러분들과 해보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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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28, 2022 드고아 지역
    드고아는 유다 광야에 있으며 예루살렘에서 남으로 약 15km 베들레헴의 남으로 약 10km의 위치에 있는 해발 1,000m에 가까운 고지이다. 예언자 아모스의 출신지였으며 예루살렘 방어의 언덕이었던 이곳에는 오늘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계곡의 낮은 지대에는 소규모의 경작지가 있고, 또한 한때의 무성했던 산재한 식물의 부식토가 있다. 이곳에서 감람열매와 시카모어열매(암 7:14)라고 불리는 과일이 재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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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28, 2022 ‘충성’이 ‘총성’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거진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양쪽 다 사상자들이 많이 났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민간인 희생자도 많이 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픕니다. 왜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왜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야만 하는지, 우크라이나도 그렇지만, 한편 러시아 군의 이야기를 들으면 러시아 군의 입장에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참가했는데, 그냥 훈련이라 우크라이나에 가면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환영해 줄 것이라는 푸틴의 거짓말에 속한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 했던 러시아 젊은 병사들의 이야기도 안타깝기는 매 한 가지입니다.   기왕 전쟁이야기로 오늘 목회칼럼을 시작했으니 군대에서 비롯된 말로 오늘 헌신예배하는 남선교회에게 담임목사로서의 권면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마도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은 ‘총대를 메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실 것입니다. 이 말은 굳이 남성으로서 군대를 갔다오지 않았더라도 우리 한국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잘 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은 지금은 군대에서 지급받는 개인화기(소총)이 작고 가볍지만, 과거에는 크고 무거웠습니다. 한국전쟁 당시만 하더라도 개인화기였던 M1 소총은 지금의 M16(미제)나 K2 소총보다 더 무거웠고, 힘이 약한 사람은 들기도 힘겨울 정도였습니다. 또한 구한말 개화기 이전의 군대에는 무기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군인에게 총이 지급된 것이 아니라 사격술이 뛰어난 군인이나 정예 부대에만 지급되었다. 일반 군인의 무기는 칼이나 창, 또는 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투가 일어나면 우선 화기를 다루는 사수인 총대를 멘 사람부터 표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군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군대에서 총대를 멘다는 것은 힘겹기도 했지만, 적의 표적이 되어서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소총병이 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총대를 메다’는 것이 아무도 나서서 맡기를 꺼리는 공동의 일에 대표를 맡거나 앞장을 선다는 뜻으로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게 상대편으로부터 미움이나 제거의 대상이 되어 불이익을 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말이 긍정적인 의미보다 부정적인 의미로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가 좋은 일에 이 말을 쓴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마다 누군가가 나서면서 이 말을 하다보니 그리 느껴지지 시작한 것 같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교회 안에서도 무슨 일을 하다가 좋지 못한 일이 생기거나 어떤 일을 해결해야 할 때 무심코 ‘총대를 메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남선교회 회원들에게 권면드립니다. 교회 일은 총대를 메는 것이 아니라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총대메고 총성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 특송처럼 십자가메고 충성을 다하는 우리교회 남선교회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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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21, 2022 룻기서
    성경 룻기는 구약성경 가운데 에스더와 함께 여성의 이름이 제목이 된 성경 중에 하나이다. 룻기를 감히 진흙 속에서 발견되는 진주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룻기의 배경이 사시기이기 때문이다. 칠흑같은 어둠속에 한줄기 빛과 같은 말씀이 룻기이다. 마치 어두움 속에서 빛이 있으라 하신 그 하나님께서 어두운 세상에 성육신하시듯, 룻기는 장차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실 메시야의 조상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줌으로 ‘은혜’를 계속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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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21, 2022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부분이 예배시에 특별순서로써 예배 구성요소 중의 하나인 ‘찬양’을 하는‘찬양대(讚揚隊)’를 성가대(聖歌隊)'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는‘찬양대’로 바로 잡아야 한다. ‘성가’는 교회 밖의 속된 노래와 구별되는 의미는 있으나, 찬양의 참 의미가 교회와 교회 밖을 구분하여 성가(聖歌)가 되고 속가(俗歌)가 되는 것으로 호칭되는 것은 아니다. ‘찬양’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섭리사역에 대한 응답으로써 하나님께 돌리는 참된 경건의 주된 요소인 것이다. 부연하면, 찬양은 창조, 타락, 성육신,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 부활, 종말, 재림 등의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속적 사건에 대한 송축(頌祝: Doxology :찬양·영광)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를 지닌 것이 찬양인 것이며 또한 이런 찬양을 하는 대오(隊伍: ranks)를 ‘찬양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가라고 할 때는 종교음악적 관점에서 타종교에서도 성가라는 말을 쓰고 있다. 예컨데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성가대 역시 초기 한국교회에선 사용되지 않던 단어다. 1913년 평양 장대현교회는 한국교회 최초로 ‘찬양대’를 조직했다. 이듬해 새문안교회에 찬양대가 구성됐고 이름을 ‘찬미대’라고 했다. 대부분 학자들은 일본의 영향으로 교회에서 ‘성가’ ‘성가대’라는 말을 쓰게 됐다고 언급한다. 1960년대 한·일 국교 정상화가 본격화된 이후 어떤 경로로, 누구에 의해서인지 단정할 순 없으나, ‘세이카다이(聖歌隊)’라는 말이 그대로 한국교회에 유입돼 성가대라는 말로 통용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찬양하는 인적 조직체를 성가대가 아닌 ‘찬양대’라고 지칭해야 한다.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시작 전에 찬송 인도자가 회중 앞에 나가서 예비적 찬송이란 뜻을 담은 ‘준비찬송’ 몇장을 부르겠다는 말로 인도하고 있다.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본질적으로 찬송은 어느 곡이든지, 언제 부르든지, 어디서 부르든지 그것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고 그 분의 영광과 그 분의 섭리와 구속사역을 기리는 것이므로 하나님만이 대상이 되는 것이 찬송인 것이다.   또한 찬송을 사람의 심성 준비에 적용시키는 것은 하나님 중심사상에 어긋나는 것이다. 찬송은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을 찬양하는 중에 그 찬양의 효력은 인간의 심령에 많은 감흥과 영성을 열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찬송은 예배의 요소이지, 심리적 요법이거나 인간의 수양적 방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찬양대의 찬양이 있은 후 교인들이 찬양대를 향해 박수를 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절대적으로 금해야 할 사항이다. 찬양대는 교인들을 대표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므로 아름다운 곡조에 감흥되어 박수를 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서게 되는 배은망덕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찬양대의 찬양이 끝나면 회중들은 ‘아멘’으로만 화답함이 정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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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rch 14, 2022 ‘중보기도’는 ‘도고’라고 해야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한국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회마다 중보기도팀이 있고 중보기도에 열심이다. 그런데 이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과연 올바른 것일까?   ▲ 중보의 의미 중보는 중재를 의미한다. 즉, 두 사람 사이에 개입해서 서로 화해시키거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는 중보라는 말이 일곱 번 나온다(사 38:14. 갈 3:19, 3:30. 딤전 2:5, 히 8:6, 9:15, 12:24). 성경에서의 중보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가 되시는 것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화목 제물로 드리셨다(롬 3:25).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과 인간은 화목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중보자가 되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예수님 이외에는 누구도 중보자가 될 수 없다. 구약시대에는 천사, 모세, 선지자가 중보 역할을 했지만,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오직 예수님만이 중보가 되신다(딤전 2:5).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께 전달되지 않는다. 반드시 예수님을 거쳐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을 허무셨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예수님이 중보로 계신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중보기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중보기도자는 오직 예수님뿐이시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신다. 따라서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사람에게 붙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도고’란 무엇인가‘도고’라는 단어는 성경에 단 한 번 나온다(딤전 2:1). 도고는 헬라어로 ‘엔튜크세이스’인데, 이는 ‘타인을 위한 기도’ 혹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자유롭고도 친밀한 기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도고는 ‘타인을 위해 하는 기도’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기에 적절하다. 우리가 말하는 ‘중보기도’는 타인을 위한 기도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기도 대상자를 중재하려는 기도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뜻이다. 그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며, 그 사람을 보호하시고 복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비는 것이다. 이는 중보자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람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 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도고’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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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rch 11, 2022 [차별금지법 바로알기 아카데미] 3/11(금) 오후 2시_김지연 교수(미주장신 영남신대 신대원)
    제64회 차별금지법바로알기아카데미 실시간 방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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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rch 08, 2022 대속죄일의 염소 두 마리
    유대력(종교력)으로 7월 10일(태양력으로 9월 중순쯤)이 대속죄일이다. 이스라엘의 절기가운데 가장 큰 절기로 불려진다. 왜냐하면 이 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가 용서함받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날만큼은 속죄제사를 드릴 대 선택되는 희생양이 두 마리이다. 그것도 양이 아닌 염소 두 마리를 선택한다. 한 마리는 속죄제사를 위해, 또 다른 한 마리는 광야에 버리기 위해 선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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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rch 08, 2022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기도의 중보자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은 아무도 자신의 이름으로는 하나님의 면전(面前)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공포와 수치를 덜어주기 위해 우리에게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언자(代言者)와 중보자(仲保者)로 보내시어 우리가 그의 인도하심을 받아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경우 하나님과 아들은 하나이시므로 아들의 중보를 거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지극한 위엄(威嚴)을 생각할 때 경악으로 몸을 떨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나서서 두려움의 영광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로 바꾸어주시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비천함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히 4:16)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된 유일한 길과 통로는 오직 그리스도이시므로(요 14:6)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른 길이나 통로가 없습니다. 더욱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요 지도자로 인(印)을 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며 그의 중보를 통해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딤전 2:5)라고 불리웁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만이 바른 기도의 어머니이며 죽은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명백한 신성모독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칼빈의 이같은 가르침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중략) 오직 하나님 편에서 자원하여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서만 하나님을 창조주로 순종할 수 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우리의 죄악됨과 그 죄악성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너무 멀어서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중보자 되시기에 합당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음 주에 계속)   *위의 글은 인터넷 월간지 ‘월간개혁신앙’에 실린 글을 교우들의 신학정립을 위해 발췌 및 전문 수정 정리한 것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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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rch 04, 2022 좋은 믿음과 잘못된 믿음 구별법ㅣ인지오류ㅣ이정훈교수의 별다방
    좋은 믿음과 잘못된 믿음 구별법ㅣ인지오류ㅣ이정훈교수의 별다방Youtube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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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February 24, 2022 창조? 진화? 이재만 선교사 강의 (1) - 기원에 관한 질문
    미국 창조과학회 이재만 선교사님의 목표사랑의교회 집회 첫 번째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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