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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믿음 바른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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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16, 2023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회개해야만 하는가?
    많은 이들이 어떤 집회, 가령 기도원에 가서 혹은 심령수련회에서 기도하는 시간에, 강사들의 초청을 듣게 됩니다. 기도 시간의 강사들은 어김없이 지난 날의 죄와 허물을 주 앞에 다 내어 놓고 회개의 기도를 강조합니다. 이런 부흥강사나 기도회 진행자들의 요청은 일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의 시간 때마다 지난 날의 죄에 대한 반복적 회개를 기도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과거 자신이 예수를 믿지 않던 시절 지었던 여러 가지 추하고 더러운 죄를 다시 기억하면 용서해 주시길, 자신의 죄와 지난 날 과오를 씻어주시길 또 꺼내어 눈물로 기도하는 이들을 봅니다. 물론 이런 이들의 기도가 틀렸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지난 날의 죄와 허물을 참으로 회개하지 않고도 회개한 것처럼 뻔뻔스럽게 잊고 사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나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믿음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가지는 혼돈은 지난 날 회개한 죄들에 대해서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회개 기도를 해야 하는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린다면 아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지난 날 불순종의 죄인으로 살 때 지었던 죄와 예수를 믿지 않고 거부했던 반역을, 또한 우리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과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순간 다 씻어집니다. 또한 나의 원죄뿐만 아니라 내가 이날 이때까지 살면서 지었던 자범죄도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다 사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원죄인 근원적인 죄, 즉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과에 대한 회개는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전되기 때문에 반복적인 회개를 요구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이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죄성에 의해 저지르게 되는 죄에 대한 회개는 날마다 우리는 기도라는 은혜의 방편을 통해 우리를 깨끗게 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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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7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03, 2023 구약에서 말하는 복이란 정말 물질과 기복을 가리키는 것인가?
    누군가가 저에게 만약 무인도에 갇히게 된다면 그리고 그곳에 책을 딱 세가지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없이 첫 번째는 ‘성경’이요. 두 번째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요. 마지막 세 번째는 서철원 박사의 ‘교의신학전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의 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을 때까지 품에 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책의 내용을 토시하나 빼지 않고 다 외우고 싶은 간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기독교강요 제2권 10장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그리고 목회자들이 언제부턴가 기복적인 신앙관으로 그리고 현세주의 신앙생활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현상은 결국 강대상을 심하게 오염시켰으며 설교자들의 설교내용을 펠라기우스적 설교로 왜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대속과 그의 구속사역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인간의 도덕적인 삶에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이 성경을, 신학을 진지하게 연구함 없다보니 쉽게 성경을 내 맘대로 해석하여 적용할 수 있는 QT에 빠졌으며 마치 QT가 진정한 성경해석인냥 교인들을 오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지면을 들어 감히 말씀드리건데, 신학과 성경의 역사적 배경없이 고안된 QT는 결국 사탄의 장난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성경을 QT하면서 가장 큰 함정에 빠지는 것이 구약에 나타난 복의 개념입니다. 이 복의 개념은 특히 오늘날 현 신자들의 믿음의 척도로 오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종교개혁당시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현세의 삶에 대한 즐거움에 제한시키지 않고 그들을 들어 올려 불멸에 대한 소망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진정한 복음설교는 기복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선포함이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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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6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27, 2023 안식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개혁주의 신학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다시 읽어내려 가면서 오늘날 교회가 정말 많이 비뚤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비뚤어졌느냐고 묻는 분이 계신다면 조금의 망설임없이 어쩌면 우리는 다시 돌이키지 못할지 모릅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 땅의 수많은 목회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과연 몇 분이나 제 말에 동의를 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느끼는 오늘날 교회의 타락과 변질, 비뚤어짐은 이제는 더 이상 참과 거짓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시기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에 쌓이게 합니다.   얼마전부터 메시아닉 쥬(예수를 믿는 유대인들)들이 다시 그리스도교(기독교)에 관심을 받으면서 한국은 물론 세계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세대주의 신학을 바탕으로한 왜곡된 신학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한 때는 이 신학사상에 빠진 적이 있는 터라 이 사상의 무서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현재 개혁신학을 Replacement Theology라고 말하며 예수님 승천 후 세워진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다는 잘못된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는 편이라 처음 이 신학사상에 대해 접했을 때 뭔가 새로운 신학이론인가 하여 그들의 사상을 추종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들이 주장하는 구약의 여러 절기와 안식일 개념이 이 땅에 참된 우리의 구속주로 오신 예수님과 충돌된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공부한 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과 칼빈주의 신학이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일일이 다 언급하기는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그때 그때 생각 날 때마다 하나하나 풀어가려 합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안식일의 개념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지를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다시 읽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주일의 개념이 성경에 근거도 없는 안식일로 둔갑하여 참된 안식일과 안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지를 또한 참된 안식을 지키고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작금의 교회는 가르쳐주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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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5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19, 2023 예수를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목회자의 삶을 살고 교회에서 목회자로 사역하면서 지금까지 가장 저를 두렵게 하는 것이 내가 가르치는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신인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입니다. 오늘 날 교회의 신자들은 물론, 목회자 역시도 누군가가 교회에 나와 있기만 하면 구원받았다고 믿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목회자는 그런 망상을 신앙으로 바꾸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어렵게 교회를 나온 자들에게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할 때는 반드시 전제가 필요합니다. 바로 당신이 죄인입니다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져야 하고 그렇기에 지옥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도 다 차치하더라도 자신들이 교회에 나와서 어느 시간이 흐르면 예수를 믿고 있다고 착각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신을 믿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신을 믿고 있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지, 예수신을 믿고 있는지는 그가 예수에 대해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내가 내 맘대로 생각하고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엄연히 우리의 신앙의 표준인 성경을 중심으로 믿음생활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이심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삶을 어떻게 선하게 살지를 말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진리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말씀을 듣는 자들 가운데 유기된 자들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그들 역시 이 땅에서 복음을 듣지 못했노라고 핑계대지 못하게 해야 함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며 마음이 많이 쓰라립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신앙을 알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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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4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17, 2023 켄터키 에즈베리대학 부흥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지금 한창 뜨겁게 미 기독교계 뿐만 아니라 세계 교회들이 주목하고 있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몇 주전부터 일어난 미 켄터키 지역의 에즈베리대학에서 시작된 부흥이라는 내용입니다. 2023년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시작된 채플에서 찬양과 기도가 끊기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부흥이 시작되었다고 떠들어 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미 전역에서 성령의 임재를 느끼고자 켄터키 에즈베리대학의 채플 예배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주 한인교회의 한 목사님은 그 현장을 직접 찾아 그 부흥의 열기를 느끼고자 자신의 휴무일을 이용하면서까지 그곳을 방문했다는 유투브 영상까지 만들어 올리신 것을 보았습니다.   다들 미쳤습니다. 현재 켄터키 에즈베리대학에서 일어난 일은 기독교의 부흥이 아니라 지난 3년간 코로나로 인해 억눌려 있던 사람들의 감정폭발에 불과합니다. 많은 이들이 현재 에즈베리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성령의 임재로 인한 새로운 부흥의 물결이라고 말합니다. 다들 헛소리입니다. 정말 이것이 진정한 성령의 부흥이라고 말한다면 말씀선포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로 인해 회개가 일어나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 부흥 현장에 있는 이들 가운데 말씀을 듣고 은혜받고 회개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저 하루 종일 찬양과 기도를 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찬양을 하고 싶어서 모여든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부흥은 노래 부르고 싶어서 노래방에 찾아 모인 이들이 만들어낸 흥분이 아닙니다.   또한 에즈베리 부흥이 진정한 성령 하나님의 부흥이 되려면 동성애자가 찬양을 인도하므로 은혜받는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곳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안이 열려 그 동성애자가 회개하고 변하는 일이 일어남이 마땅함일 것입니다. 지금 에즈베리 현상은 또 다른 영적 암울함과 어둔 세력들의 한낮 장난질에 불과할 뿐입니다. 절대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흥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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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3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11, 2023 예수 믿어야 천국갑니다.
    오늘날 교회는 트랜드화되어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자신들의 교회의 특성을 드러내고 자랑하므로 교인들을 모으는 전략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잘 하는 교회는 좋은 교회이고 또한 이런 교회가 지역사회에 특징을 드러내면 성장을 하곤 합니다. 그렇다보니 교회의 목회자들도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적 사역이 아니라 교회를 운영하는 CEO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각 교회가 목회자 청빙을 할 때도 목사의 메시지에 주목하기 보다 그 목사가 어떻게 교회를 잘 성장시키고 교회를 잘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더 살피게 됩니다. 또한 각 교회는 서로 경쟁을 하듯 내 교회와 이웃교회의 차별을 두어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잡화점을 만들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정말 위험천만한 생각입니다. 제가 귀가 따갑도록 외치고 있는 것이지만 교회는 Costco나 Walmart와 같은 내가 갖고 싶은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내가 선택해서 가는 상품점이 아닙니다. 내 모습과 품위에 맞는 명품 가방을 구입하고자 쇼핑하는 쇼핑센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죄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죽음을 면하고 영원한 삶을 얻고자 생명의 말씀을 들으러 가야만 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한 주간 지친 내 영혼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면 우리는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들의 죄악상을 깊이 드러내고 그 죄로부터 해결받는 방법과 영원한 진노 아래 처해진 사망과 고통의 죽음을 벗어나는 방법을 얻고자 찾아 나서야 하는 곳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굳이 교회를 찾아 매주일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미신적인 종교생활을 할 바에 차라리 절간을 찾아 공을 드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제발 종교생활에서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예수를 참된 나의 구세주로 모시고 참된 구원에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비록 이 땅에 살지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 예수를 바로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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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
    올랜도바른믿음교회February 27, 2023 당신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아십니까?
    성경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한탄을 기록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 해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뜻이거니라고 생각하고 억지로(?) 넘깁니다. 실질적으로 내게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난 성경의 인물보다도 더 심한 갈등과 원망속에서 시간을 보낼지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바로 욥기와 요나서의 이야기입니다.   욥기서의 이야기야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내 삶에 고통스런 일이 일어났을 때, 욥의 불평과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이 그래도 우리보다 낫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속에 속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질문은 왜 인생의 고난이 내게 불어닥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근본적인 원인과 이유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지도 않으신 채 당신이 누구신지만 장황하게 설명하시고 감히 나에게 너의 고통을 따지느냐로 말씀하십니다.   욥의 이야기와는 다른 측면이 있지만, 요나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게 싫다는 일은 억지로 시켜놓고 결국 그 일을 하게 하심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요나의 작은 불평이 오히려 그의 인격에 문제인 것처럼 요나서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우리는 우리의 원치 않는 고난과 우리 삶의 불편을 불평할 수 없는 것이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세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젊었을 적 그 혈기넘침으로 자신의 일이 아닌 고통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려 할 때는 철저하게 도망자의 삶을 살게 하시다가 모든 꿈과 희망도 다 잃고 포기하고 있을 때 그것도 할 수 있는 능력과 젊음이 다 지난 시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일군으로 다시 세우십니까? 모세의 입장으로써는 그가 주님을 만난 첫 만남에서 거절한 이유가 충분하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늘 이런 식이실까요? 도저히 그 답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답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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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
    올랜도바른믿음교회February 20, 2023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며칠 전 유투브영상에서 한 목사님의 설교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제가 추구하는 설교내용을 선포하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들의 심각한 문제가 교회에 나와 있는 교인들을 볼 때, 구원받았음을 전제로 하고 설교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설교가 구원받은 이후의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99.999%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과 신자들의 도덕성 문제를 보고서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들이 과연 저렇게 사는 것이 맞나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교회내의 신자들끼리도 구원받은 자들이 그렇게 행동해도 되는 것이냐고 반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교회내의 신자들의 문제들에 대해 그 원인을 그 영상의 목사님이 말씀하십니다. 애초에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말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기에 그런 일들을 교회를 다니면서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저는 100%공감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 있기만 하면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의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교회내에서 목사로 장로로 직분자로 세워졌음에도 자신들이 일으키는 반기독교적, 도덕적 문제의 심각성을 모릅니다. 죄를 짓고도 죄를 지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교회가 나락으로 떨어졌을까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문제는 기독교가 왜 그렇게 변질되었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1960년대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교회 내부적으로 문턱을 낮추는 교회,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는 교회 등등, 교세의 확장을 위해 복음을 간단하게 조작하고 성경이 말하는 구원관과 교회관이 아닌 세상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교회와 복음으로 변질시키면서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제 기억만해도 어렸을 때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으면 심각한 영적 통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참으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나길 간절히 기도한 적이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교회는 이런 영적인 몸부림은 둘째치고 신자들이 구원을 얻는 과정(구원의 서정)을 아예 통째로 버려버렸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구원받았는지도 받지 못했는지도 모르는 상황속에서 기복적이고 신비적인 신앙으로 믿음생활하면서 그것을 구원받은 것으로, 영생을 얻은 것으로 착각하며 불법을 저지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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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
    올랜도바른믿음교회February 13, 2023 당신은 정말 신앙에 관심이 있습니까?
    최근들어 하루에도 몇 십번씩 이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 가운데 몇 퍼센트나 참된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정말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을 믿음으로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스스로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교회에 다니고 있는 이유가, 지금 이 시간, 예배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가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세상 이방종교와 다를 바 없이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들과 현재 우리 삶의 현실적 문제는 서로 같이 할 수 없는 경계선이 있는 것 같습다. 마치 성경과 삶이 서로 다른 평행선을 그리듯 각자의 길을 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보니 성경의 하나님과 나의 삶의 문제의 교차점을 찾고자 기복적이고 현세적인 교회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근데, 사실 오늘날 교회가 기복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신앙은 종말론 가운데 후천년설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초까지만 해도 기독교의 종말론은 무천년설이 중심이었습니다. 개혁주의가 믿고 고백하는 종말론이 바로 무천년설입니다. 하지만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세대주의 종말론에 영향으로 여기 저기서성경의 종말론 사상이 다양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후천년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후천년설이란 예수님의 재림과 그분의 통치가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이 이 땅에서 기독교의 번영과 황금기를 누린 후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을 근거로 해서 예수가 영적 통치하는 현 시대는 점점 더 좋아질 것이며 그렇기에 교회와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번성하고 번영을 누리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교회는 현실에서 잘됨인 번영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 주장의 대표적 인물인 바로 두 조씨 목사님들(고 조용기 목사 및 Joel Osteen)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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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9
    올랜도바른믿음교회February 05, 2023 개혁주의 종말론에 대해 바로 알기
    언제부턴가 한국 기독교가 이스라엘에 대한 시각이 혼동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최근들어 기독교 신자들이 현 이스라엘인 민족적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대인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장자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전문 방송채널이라고 하는 유투브 ‘Brad TV’에서는 주님이 오시기 전 역사적 이스라엘이 다시 주님께로 돌아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와 선교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도 한 때는 이런 내용에 심취해서 민족적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이 역사적 이스라엘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스라엘을 봐야 주님 오실 때를 알 수 있다고 설교까지 하곤 했습니다.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정말 위험천만한 일을 한 것이나 다름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현재 기독교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스라엘 회복과 관심은 그 뿌리가 세대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대주의 신학은 19세기와 20세가 초 개혁주의 교회들이 이단으로 지정한 신학사상입니다.   하지만 이 세대주의 운동이 신비주의 운동과 성령운동의 연합으로 다시 기독교 신자들에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욱이 1948년 이스라엘 나라가 역사적으로 다시 회복되면서 세대주의가 주장하던 주장이 더 힘을 얻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최근의 기독교는 정통 기독교 진리가 무너지고 이단 사이비 사상이 너무 많이 침투되어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일은 기독교가 오랜 시간 가르치고 지켜오던 ‘개혁주의 종말론’에 대한 관심과 교육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천년왕국도 사실은 지금이 바로 주님이 영적으로 통치하는 천년왕국임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미 구약과 신약의 일부에서 예언된 모든 예언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어 졌음을 알고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므로 발생되는 심각한 오류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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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8
    올랜도바른믿음교회January 30, 2023 바른믿음으로 바른신앙을
    하루에도 몇 번씩 아니면 혹은 몇 십번, 몇 백번씩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속 시원하게 보이지 않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 때, 우리에게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생겨났을 때, 우리는 간절히 주님께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길, 해결책이 당장 주어지길 기도해 봅니다. 하지만 그런 기도도 잠시 그 문제에 대한 해결도, 그 상황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곤 이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이 좀 더 필요해서 그런가 보다 그래서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 다른 이들은 언젠가는 해결되겠지 그저 기다려 보자 등등으로 체념하게 됩니다. 이런 우리의 믿음행위가 결국은 오늘날 성령운동의 엉뚱한 방향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내 삶에 현실적으로 체험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내 삶에 관계하심을 느껴서라도 내가 믿는 믿음이 거짓이 아니고, 내가 믿는 신앙이 틀린 것이 아니길 바라는 간절함 때문에 방언과 예언, 신유와 치료 등 여러 가지 체험적인 은사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런 이들의 간절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은 그 어디에도 우리 삶 속에 직접적인 체험으로 하나님의 존재나 그의 간섭하심이 뚜렷이 나타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비적인 체험신앙을 가지는 것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특별한 체험이 우리 기독교의 참된 신앙이라면 욥기는 그야말로 우리에게 도덕적인 도덕경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저 아픈 사람에게 말 잘해야 한다는 메시지만 던져 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쉽지 않게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결코 바른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을 가짐의 시작은 성경의 하나님,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믿고 고백했던 하나님을 알게 되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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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January 23, 2023 새해를 맞이하며 희망하는 것
    2023년도가 밝았습니다. 한 해 한 해가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생각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니 뭔가 분명 특별한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자신의 믿음에 담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시간들을 보내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새해 들어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나면 당황하게 됩니다. 혹자는 올해 일진이 안 좋은 것은 아닌가라고 두려움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다 헛된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에 동일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좋지 못한 일들로 인해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 일이 우리의 올 한 해를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좋지 못한 일들도 오늘 일어난 일이니 오늘만 우리에게 씨름을 줄 뿐, 내일 우리에게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자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불행이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관과 소용돌이 속에서 살다보니 생각지도 않은 일들을 당하면 그 즉시 그것을 나에게 닥쳐진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타국으로 갔을 때 요셉은 세상 절망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인고의 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자신 뿐만 아니라 한 민족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절망과 같은 순간이 더 크신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시는 시작점이라면 우리는 지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중을 기억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지배하시는 분과 그 분이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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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6
    올랜도바른믿음교회December 18, 2022 때가 차매
    지난 주 목회칼럼을 통해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죄의 전가인가 아니면 죄책(죄의 책임)의 전가인가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 날 많은 교회에서 이 부분이 정확하게 이해되어지거나 교육되어지고 있지 않다보니 심지어 어떤 신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를 위해 ‘죄덩어리가 되셨다’라고까지 이해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가운데 성자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간의 죄를 속량하시므로 구속주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 속량의 방법이 바로 참 하나님이 참 인간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참 인간이 되셨다는 말은 결국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던 그 원 상태의 인간모습이었습니다. 범죄 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온전한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반역하므로 시편 8편에서 말하는 인간의 존귀와 영광스러움을 부패케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창조하시므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하나님 백성을 만드셨는데, 인간의 교만과 반역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즉 왕과 백성의 관계를 깨뜨림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작정과 언약에는 신실한 분이시므로 죽은 인간을 다시 창조하실 것을 작정하신 것이 아니라, 다시 원상태로 회복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말하듯 율법은 죄의 대가를 반드시 치루어야만 인간의 죽음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미 죄로 오염된 인간이 아무리 깨끗하고 선하다고 해서 인간을 대표해서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의 값을 치루는 방법은 죄없는 인간밖에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의 제사법에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흠없고 점없는 인간이 되어 우리 죄를 대신 속량하시고자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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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5
    올랜도바른믿음교회December 18, 2022 죄의 전가인가, 죄의 대가지불인가
    얼마전 동영상으로 한 목사님의 집회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유투브에서 꽤 유명세를 남기고 있는 목사님입니다. 저도 가끔 이 분의 영상을 보면서 공부도 하고 설교 참고자료로 쓰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더 이상 이 분의 성경강의나 집회 영상을 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다시 정리하고 공부하면서 많은 목사님들의 신학과 교리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단 이 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분의 영상을 보면서 많은 분들이 동의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예전에 저도 이 분의 영상을 보면 그렇게 설교했던 적이 있음)이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정말 위험천만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와 성육신 교리를 가르치지 않다보니 제 마음대로 해석하다가 생긴 오류입니다.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이런 잘못된 생각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성경을 나름 잘 풀이한다고 하시는 분들이 기독교 교리를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문화적, 시대적 배경만을 가지고와 해석을 하다보니 자의적인 해석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해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죄없고 흠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값, 즉 죽음을 대신 치루신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죄의 전가교리를 가지고 와서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죄없으신 완전한 인간인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불경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가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죄인이 죄값을 치루신 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신이신 그 분이 인간이 되셔서 죽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인간 중에 누구 하나 가장 선하게 살던 한 사람이 대신 인류를 대신해서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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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December 05, 2022 Incarnation(성육신)
    12월 첫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Covid-19가 우리 삶의 많은 것들을 바꿔 놓은 것 같습니다. 요즘은 밖에 나가봐도 어느 때와 다르게Christmas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불과 몇 전까지만 해도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바로 이어 성탄절의 분위기를 거리마다 각 가정마다 느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탄절이 되면 몇 몇 분들이 주인공없는 성탄절이라 탄식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마저도 듣기 쉽지 않은 세상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거리에서는 캐롤송도 잘 들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미소 속에서도 성탄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냉철하게 생각한다면 그리 염려할 일도 아니지만, 더 이상 예전같이 성탄절을 맞이하여 아기 예수의 오심을 전하는 일들이 없음에 찜찜할 따름입니다. 그나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예수의 상징들도 한낮 휴일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 코로나 이후 이 세상이 만난 성탄절인 것 같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망각한 채 성탄축제를 즐김도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성탄의 의미와 함께 그 자체 축제도 없어져 버림에 아쉬움을 갖게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쩌다가 이렇게 바뀌어 버렸을까요? 물론 이는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실 때가 다 되었음에 일어나는 현상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탄의 참된 의미를 다시 회복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 동안 우리가 망각하며 살았던 하나님 독생자의 성육신과 그 십자가의 의미를 회복하므로 참된 구원의 진리를 바로 잡고 복음의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 복음의 시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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